"인순아 아버지 진지 잡수로 오시라케라"
이른 아침, 어머니는 정지에서 그릇에 반찬을 담아내며 말씀하셨다. 나는 구야네 집 텃밭의 빈 고랑으로 걸어가서 밭 돌담을 넘어서 당성개울이 내려다보이는 논둑에 섰다.
"아버지 진지 드시러 오이소예~"
아버지는 대답이 없으셨다. '쥬욱 쥬르륵~ 쥬욱 쥬르륵~' 아버지께서 종이 뜨는 소리가 들렸다.
엄천골에는 닥종이 공장이 많았다. 마을과 가깝고 골을 타고 흐르는 물이 있는 곳이면 닥종이 공장이 들어섰다. 꽃봉산 등성이의 끝자락에서 동강마을이 흘러나와서 엄천강을 바라보았고 꽃봉산 골짝에서 당성개울이 흘러나와서 엄천강으로 달려들었다. 아버지의 닥종이 공장은 당성개울에 있었다. 산자락에 붙박인 동강마을의 시간이 당성개울로 흘렀다. 당성개울의 물을 막는다고 동강에서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이었는데 아버지는 해마다 얼었던 개울물이 풀리는 봄부터 닥종이를 뜨기 시작하셨고 닥종이 뜨기를 마치고 나면 지난 가을에 심은 보리가 누렇게 익기 시작했다.
‘물로만 만들어지다가 다 만들어지고 나면 물과 적이 되는 것이 종이다.’
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만들어진 종이가 물과 적이 된다는 말은 종이가 저 난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말과 같은 말일 것이었다. 종이를 만들어 내는 물은 제 고유의 맑은 성질이 온전히 살아 있어야 했다. 봄, 당성개울의 물은 바닥에 고였다가 들고 일어나는 토사물이 없이 맑았고 수면 위로 내려앉는 낙엽 한 잎 없이 깨끗하였다. 작년 볕 좋은 가을에 아버지는 읍내 제재소에서 맞춘 송판을 사각 틀이 되도록 잇대어 붙여서 지통을 만들어 두셨다. 사각 틀의 한 면이 일곱 자였고 총 둘레가 스물여덟 자였다. 깊이가 한자 반이었는데 아버지는 8부까지 물을 채웠다. 축대를 쌓아서 새로 만든 지통의 높이는 아버지의 허리께쯤 되었다. 여름폭우에 개울물이 넘쳤고 그 때마다 지통은 휩쓸려서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닥 섬유질이 풀어진 지통 속은 구름이 잔뜩 낀 하늘같았다. 지통 위를 가로지르는 막대의 한 가운데에 줄을 묶고 늘어뜨려서 발 받침대를 매달았다. 대나무로 만든 발은 가느다란 국수발보다 더 가늘었다. 발은 어른이 고개를 숙여서 드나들 만큼의 방 살문크기였다. 발은 늘어뜨린 줄의 길이만큼 자유롭게 지통 속을 왔다 갔다 했다. 아버지는 발이 얹힌 받침대의 양 끝을 두 손으로 잡고 지통 속에 담그셨다. 발을 몸의 안쪽으로 물을 채면서 당겼고 다시 몸의 바깥쪽으로 내보냈다. 다시 담가서 좌로 한 번 다시 담가서 우로 한 번 밀고 당기셨다. 밀고 당기는 매 사이마다 발은 아버지의 몸 정면에서 한 박자 머물러서 발 위에 실린 물을 지통 속으로 흘려보냈고 물에 섞였던 닥 섬유질만이 발에 빈틈없이 남았다. 섬유질을 발로 채서 낚아 올리는 아버지의 몸짓은 춤을 추듯 하였고 지통 속에서 흔들리는 발의 동선에 따라 울려 퍼지는 물소리는 음악 같았다.
어머니께서 놉의 반찬거리와 밭에 심을 푸성귀의 종자를 사러 읍내로 가시며 내게 선일을 맡기셨다. 지통에 떠다니는 섬유질의 구름이 얼추 걷어져 나가면 나는 섬유질을 한 동이 넣고 섬유질이 서로 잘 엉겨 붙도록 닥 풀(황촉규)을 두어 동이 부었다. 아버지와 함께 지통 속의 내용물이 잘 섞이도록 대나무로 만든 휘젓이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저었다. 휘저을 때 속 빈 대나무가 부룩부룩 휘익휘익 소리를 냈고 섬유질이 회오리쳤다. 아버지의 회오리가 내 회오리와 부딪쳐서 섬유질은 지통 전체로 골고루 퍼져서 구름이 되었다. 아버지는 다시 발을 움직여서 구름을 뜨기 시작하셨다. 나는 통나무로 만든 구유에 물을 붓고 닥 풀이 잘 우러나도록 괭이를 담가서 닥 풀을 짓이기고 앞뒤로 저었다. 괭이 끝에서 꿀렁꿀렁 소리가 났다. 닥 풀이 풀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습지가 켜켜이 쌓인 마실 위 끄트머리에 새로 만든 습지를 눕히려고 베개 한 줄을 놓았고 섬유질이 잘 묻은 발을 마실에 눕혀서 오동나무로 만든 원통형의 궁글통을 발 위로 누른 채 좌우로 한 번씩 굴려서 물기를 뺐다. 베개는 지리산 엄천 골짝 진 땅(진토)에서 자생하는 키가 1m쯤 되는 '베개꼴'로 만들었다. 8~9월에 채취한 질기고 튼튼한 베개꼴을 가느다랗게 찢어서 사용했다. 모든 습지는 베개를 하나씩 베고 누웠다.
"문종이 한 장 맹글라믄 절을 일곱 번 해야 된다 일곱 번."
발을 젓고 마실에 습지를 보태는 과정까지 매번 당신의 목 고개와 허리가 아래로 숙여지는 것을 두고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었다. 마실에서 발을 떼어낼 때 쫘악 하는 소리가 일어섰다. 섬유질이 일곱 번의 절 끝에 습지 한 장으로 태어나는 소리였다. 눈발이 날리는 이른 봄 아버지의 지통은 얼음물처럼 찼다. 아버지는 지통 옆 아래쪽에 돌을 놓아서 냄비를 걸었고 마른 솔가지로 불을 피워서 물을 데웠다. 지통 물이 아버지 손을 얼렸고 냄비 속 데운 물이 아버지의 손을 녹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곁에서 선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선일 틈새로 연등 쑥떡을 만들었고 남새밭을 가꾸었고 볍씨를 물에 담갔고 새벽마다 우리들의 도시락을 네 개씩 싸셨다. 눈 속에서 매화꽃이 피고 동초꽃대가 올라와서 씨를 맺는 긴 봄 시간 동안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엄천 골짝에서 재배되는 닥나무 껍질(닥 피)을 수매했다. 해마다 가을에 베어 낸 닥나무는 다음 해 가을에 훌쩍 자라 있었다. 늦은 가을에 닥나무 주인은 동네 어귀의 삼굿에서 닥나무를 삶았다. 삼굿의 흙을 걷어내면 동네사람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닥나무를 한 아름씩 챙겨서 껍질을 벗겼다. 벗겨 낸 껍질은 주인이 가졌고 껍질이 제거된 고구마 속 빛깔의 닥나무를 동네사람들은 땔감으로 가져갔다. 닥나무가 익을 때 고구마 익는 냄새가 났는데 삼굿 닥 삶는 소식을 몰랐던 동네 사람들이 고구마 익는 냄새를 맡고 뒤늦게 달려왔다.
겨우내 닥 피에 붙은 시커먼 겉껍질을 닥 도마에 대고 닥 칼로 긁었다. 당성개울의 얼음물에서 삼일 동안 불린 닥 피를 도마와 칼 사이에 놓고 주욱 잡아당기면 촤르르 소리를 내면서 겉껍질이 벗겨져나갔다. 겉껍질을 벗고 뽀얘진 닥 피는 백 닥이 되었다. 겨우내 백 닥을 잘 말려 두었다가 봄에 개울가에서 쇠 통에 양잿물을 넣고 삶았다. 끓는 양잿물이 질금질금 넘쳤고 장작은 하루 종일 불꽃을 토해냈다. 어머니는 삶은 백 닥을 개울물로 헹궈서 양잿물 기를 뺀 다음 반석 위에 놓고 납작한 방망이로 완전히 물러질 때까지 쳤다. 방망이를 치켰다가 백 닥을 향해 내려치는 어머니의 등에 동생이 매달려서 잠이 들었다.
나는 봄 동안 당성개울에서 놀았다. 놀다가 배가 고프면 진절매로 가서 진달래꽃을 훑어서 입에 넣었고 닥종이 건조장이 있는 움막 가에 늙은 아카시 나무에 꽃이 달리면 따서 먹었다. 아카시 꽃은 아무리 따도 가뭇없는 진달래꽃과는 달라서 한 송이 따면 입 안이 미어졌다. 아카시 꽃 냄새는 진했다. 꽃을 넘기는 목구멍에서 꽃 비린내가 올라왔다. 속이 뒤틀렸고 메슥거렸다. 명치가 발버둥을 치면서 아카시 꽃을 게워냈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반석 위로 내리치는 어머니의 방망이질 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어머니의 등에 매달린 동생의 잠든 목 고개가 흔들리는 것이 아득하게 보였다. 그 뒤로 나는 아카시 꽃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렸다.
어머니는 읍내 시장에서 놉의 끼니 반찬거리를 사 오셨다. 놉은 주로 서쪽에서 왔고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놉이 예전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였는데 지금은 흑수염이 거뭇한 장년이었다. 놉의 말투는 결을 타면서 일렁거리다가 말꼬리가 둥글게 말렸다. 놉의 방이 따로 없어서 나는 아버지와 놉과 작은방에서 잤다. 밤에 아버지의 등을 보고 누워있으면 아버지의 등 너머로 놉의 체취가 맡아졌다. 냄새는 깊은 잠의 숨결로 토해졌는데 절여지고 오랜 묵은 냄새였다. 지통 속 구름냄새에 담배냄새가 배인 것 같기도 한 냄새가 참 헛헛했다. 집을 떠나 온 사람에게서는 다 이런 냄새가 나는 것인가 보았다. 놉은 아버지와 겸상하였는데 찬이 걸었다. 매끈한 달걀찜이나 붉은 실고추와 초록 실파가 곱게 박힌 달걀 프라이가 올라왔다. 아버지는 종이를 뜨시다가도 종종 남해의 먼 섬에 다녀오시곤 했다. 아버지는 섬사람들에게 외상으로 놓고 온 닥종이 값을 수금 하셨다. 아버지가 안 계실 때 나는 어머니와 큰방에서 자면서 먼 섬으로 가신 아버지한테도 집 떠나 온 놉의 그 헛헛한 냄새가 배어들 것인지를 막연히 생각했다.
일요일에는 식구들이 모여서 닥종이를 말렸다. 습지를 마실에서 한 장씩 떼어서 달궈진 건조기의 양면에 붙였다. 다 마른 종이를 건조기에서 떼어낼 때 종이는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매끈했고 차랑차랑 소리가 났다. 건조기는 다리미를 커다랗게 뻥튀기해 놓은 것 같았고 키가 어른만 했다. 건조기에서 한 번에 여섯 장을 말렸다. 건조기의 한 면에 베개 달기, 비 질 하기, 종이 떼기의 각 단계마다 한 사람씩 붙어서 세 사람이 조를 이루었다. 양면의 두개 조와 아궁이에 불을 때는 사람까지 모두 일곱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하루 종일 건조기의 아궁이에 나뭇가지를 분질러 넣었다. 불 때기는 재밌다가도 지겨웠다. 작은언니는 베개 위에 가느다란 대나무로 만든 이릿대를 대고 베개를 조심스럽게 들추어 올려서 습지의 끝이 이릿대에 말리게 했다. 베개를 다는 일은 불 때는 일보다 더 기술이 필요했다. 베개를 다는 과정에서 파지가 제일 많이 생겼다. 이릿대로 습지를 걷을 때 아래 습지가 따라오면 아래 습지는 구멍이 생겨서 파지가 되었다. 파지는 다시 지통 속에서 구름이 되었다. 큰언니가 습지가 말린 이릿대를 걷어서 건조기에 대고 빗자루로 쓸어서 붙였다. 습지가 찢어지지 않도록 비질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베개달기 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닥종이 20장이 1권이었다. 종이를 말리는 틈새로 아버지는 1권마다 한번 씩 종이 끝 모서리를 접어서 표시해 두셨다. 종이가 10권이면 1축이 되었고 2백장이었다. 10축이 열 번이면 1동이 되었고 1동은 2천장이었다. 낮 동안 말린 종이를 밤에 세었다. 신생의 종이냄새가 가득 찬 방안에서 내려앉는 눈꺼풀을 치뜰 때마다 한 권의 종이가 접히는 묵직한 소리를 타고 기나긴 하루의 피로는 넘어설 수없는 막막한 절벽으로 덮쳐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번에 종이 한권씩을 마주잡고 세로로 접어서 갈무리 지었고 그렇게 다 세고 나면 종이는 1동으로 포장이 되었다. 봄 내내 만들어 내는 종이는 모두 10동으로 2만장이었다.
건조기의 아궁이 앞에서 하루 종일 불을 때고 난 내 코밑은 새까매져서 어머니는 나를 보고 웃으셨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는 때는 우리들을 칭찬할 때였는데 어머니의 웃는 입가에는 늘 피딱지가 붙어있었다. 부르튼 자리가 또 부르트는 입술의 피딱지는 논에 벼가 무릎까지 올라오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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